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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하르트 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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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인하르트 셰어는 독일 제국 해군 제독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중 고해함대 사령관과 해군 참모총장을 역임했다. 그는 1879년 해군에 입대하여 어뢰 전문가로 명성을 얻었으며, 지휘관 경력을 거쳐 1916년 고해함대 사령관이 되어 유틀란트 해전을 지휘했다. 셰어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옹호하며, 1918년 해군 참모총장으로 승진했지만, 종전 직전 빌헬름스하펜 반란으로 인해 계획했던 영국 해군 공격은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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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하르트 셰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라인하르트 셰어
인물 정보
이름라인하르트 셰어
원어 이름Reinhard Scheer
출생일1863년 9월 30일
출생지오베른키르헨, 헤센 선제후국
사망일1928년 11월 26일
사망지마르크트레드비츠, 바이마르 공화국
군사 복무
소속독일 제국 해군
복무 기간1879년 – 1918년
최종 계급해군 대장
지휘

제2전함전대
제3전함전대
대양 함대
해군 참모총장
주요 참전제1차 세계 대전
로우스토프트 기습
유틀란트 해전
수상아래 참조
경력
함선

2. 초기 생애 및 경력

라인하르트 셰어는 1863년 니더작센주 오베른키르헨에서 태어났다.[1] 중산층 출신이었던 셰어는 당시 상류층 가문 출신이 주류였던 카이저리케 해군에서 경력을 시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2]

2. 1. 해군 입대 및 초기 복무

셰어는 1879년 4월 22일 15세의 나이로 독일 제국 해군에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했다.[1] 첫 해상 임무는 범선 프리깃 SMS ''니오베''에 배치되는 것이었다. ''니오베''호에서 1879년 6월부터 9월까지 첫 순항을 하며 항해술과 기계공학을 훈련받았다. 9월 독일로 돌아온 후 해군학교에 배치되어 장교 훈련을 계속했다. 1879년 사관후보생 평가에서 "만족스러움" 등급을 받았지만, 이듬해 해군 사관후보생 시험에서는 학급에서 두 번째로 높은 성적을 받았다. 해군학교 졸업 후 포술, 어뢰전 및 보병 훈련을 위한 6개월간의 특별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 후 포술 훈련함 SMS ''레나운''에 배치되었다.[1] 셰어는 짧은 기간 동안 장갑 프리깃 SMS ''프리드리히 카를''에서 복무했다. 사관후보생 훈련 마지막 해에는 세계 일주를 한 프리깃 SMS ''헤르타''에 배치되었다. 이 배는 멜버른, 요코하마, 고베 및 나가사키, 상하이를 항해했다.[3]

2. 2. 동아프리카 함대 복무 및 어뢰 전문가

1884년부터 1886년까지 동아프리카 함대에서 복무하며, 훗날 고해함대 사령관이 되는 헤닝 폰 홀첸도르프와 인연을 맺었다. 프리깃 승무원으로 복무 중 Leutnantde(중위)로 진급했다.[3] 1884년 12월, 카메룬에서 친영 토착 족장 진압을 위한 상륙 부대에 참가했다.[4]

1888년부터 에서 어뢰 훈련을 받고, 의 어뢰 장교로 동아프리카 함대에 다시 배치되었다. 1890년 독일로 돌아와 의 어뢰 연구 사령부 교관으로 근무하며 어뢰 전문가로서 명성을 쌓았다. 킬에서 근무 중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의 눈에 띄어, 1897년 티르피츠가 제국 해군청 국무장관으로 승진한 후 셰어를 어뢰 부서로 발령했다.[3]

2. 3. 지휘관 경력

Leutnantde(중위)으로 진급한 후, 셰어는 경순양함 의 함장을 역임했다.[5] 1905년 ''카피텐 츠어 제''(대령)으로 진급했고,[6] 1907년부터 2년간 전함 의 함장을 맡았다.[6] 1909년에는 셰어가 순양함 SMS ''프린체스 빌헬름''에서 함께 복무했던 홀첸도르프 제독[7]휘하 고해함대 참모장이 되었다.[8] 셰어는 47세의 나이로 홀첸도르프 참모직을 맡은 지 6개월도 채 안 되어 장성급 계급인 소장(Konteradmiral)에 도달했다.[7] 1911년 해군 총국장을 거쳐,[7] 1913년 1월 고해함대 제2전투함대의 6척의 전함 함대 사령관으로 해상 지휘관으로 복귀했다.[9]

3. 제1차 세계 대전

1913년 12월 9일, 셰어는 제독(Vizeadmiral)으로 승진했다.[10] 그는 1915년 1월까지 제2전투전대에 남아 있었는데, 그 무렵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3. 1. 제3전투함대 사령관

1915년 1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셰어는 제3전투함대 사령관을 맡았다.[10] 이 전대는 카이저급 전함 5척과 쾨니히급 전함 4척[11]으로 구성된 독일 함대에서 가장 강력한 전함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셰어는 수적으로 우세한 영국 해군의 일부를 유인하여 독일 함대가 압도할 수 있도록 영국 해안에 대한 공격을 주장했다. 그는 지나치게 신중하다고 생각한 프리드리히 폰 인게놀 제독을 매우 비판했다.[10]

스캐버러, 하틀풀, 휘트비 폭격 당시 인게놀이 더 약한 영국 전대를 공격하는 대신 철수했을 때, 셰어는 "[인게놀]은 미리 계획된 대로 적의 특정 부대와 조우할 기회를 빼앗았는데, 이제 그 계획이 정확했던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10] 1915년 1월 도거뱅크 해전에서 블뤼허호가 침몰한 후, 카이저는 2월 2일에 인게놀을 해임했다.[12] 후고 폰 포흘 제독이 함대 사령관으로 그를 대신했다. 포흘은 매우 신중했고, 1915년 남은 기간 동안 헬골란트에서 120nmi 이내에서만 이루어진 5차례의 효과 없는 함대 작전만을 수행했다.[13]

3. 2. 고해함대 사령관 취임

후고 폰 폴 제독이 질병으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라인하르트 셰어 제독은 1916년 1월 18일에 고해함대 사령관에 취임했다.[14] 셰어는 사령관 취임 후 "북해 해전 지침(Guiding Principles for Sea Warfare in the North Sea)"을 작성하여 자신의 전략 계획을 제시했다. 그의 핵심 전략은 U보트 활동과 체펠린 급습 증가, 그리고 함대 출격 증가를 통해 영국 대함대(Grand Fleet)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압박을 가하면 영국 대함대는 원거리 해상봉쇄를 포기하고 독일 함대를 공격해야 할 것이었다.[15] 카이저는 1916년 2월 23일에 이 건의를 승인했다. 카이저의 승인을 얻은 셰어는 이제 함대를 더욱 적극적으로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15]

1916년 4월 24일, 카이저가 무제한 잠수함전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자, 셰어는 대서양에 있는 모든 U보트에게 독일로 귀환하여 상선 공격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6] 셰어는 주요 영국 해군 기지 앞에 U보트를 배치하여 함대를 지원하는 데 사용할 계획이었다. U보트는 제1 정찰전대(I Scouting Group)의 프란츠 폰 히퍼 제독이 지휘하는 전함 순양함의 폭격으로 영국 함대가 항구를 떠날 경우, 이들을 요격할 예정이었다.[17] 셰어는 5월 17일에 작전을 계획했지만, 전월 전함 순양함의 손상과 제3 전투함대(III Battle Squadron) 소속 여러 전함의 응축기 문제로 인해 계획이 지연되어 결국 5월 31일로 연기되었다.[18]

3. 3. 유틀란트 해전 (1916년 5월 31일)

셰어 제독의 함대는 16척의 드레드노트, 6척의 프리드레드노트, 6척의 경순양함, 31척의 어뢰정으로 구성되어 1916년 5월 31일 이른 아침에 야데에서 출발했다. 이 함대는 히퍼의 5척의 전함순양함과 지원 순양함, 어뢰정과 함께 항해했다.[19] 영국 해군의 룸 40은 작전 계획이 담긴 독일군 무선 교신을 가로채 해독했고, 존 젤리코 제독이 이끄는 대함대는 고해상 함대를 격파하기 위해 전날 밤 28척의 드레드노트와 9척의 전함순양함으로 구성되어 출격했다.[20]

16시(UTC)에 두 전함순양함 부대가 조우하여 셰어의 전함 함대 쪽으로 남쪽으로 이동하며 교전을 시작했다.[21] 고해상 함대에 도착하자 데이비드 비티의 전함순양함은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존 젤리코 제독의 지휘하에 빠르게 접근하는 대함대 쪽으로 독일 함대를 유인했다.[22] 북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셰어의 선두 함선은 제5전투함대의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과 교전했다.[23] 18시 30분경 대함대가 현장에 도착하여 북동쪽에서 셰어의 함대를 T자형으로 포위할 수 있는 위치에 배치되었다. 이 위험한 위치에서 함대를 벗어나기 위해 셰어는 남서쪽으로 16포인트 회전을 명령했다.[24] 18시 55분, 셰어는 영국 함대를 공격하기 위해 또 다른 16포인트 회전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25] 그는 나중에 자신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 아직 '야간 순항 명령'을 내릴 시기는 아니었다. 적은 어둠이 내리기 전에 우리를 싸움에 몰아넣을 수 있었고, 우리의 주도권 행사를 막을 수 있었고, 마지막으로 독일 만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이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막대한 비용을 치르더라도 또 다른 공격으로 적에게 두 번째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또한 고전하고 있는 비스바덴을 돕거나, 적어도 선원들을 구출할 마지막 기회를 제공할 수 있었다.[25]

이 기동은 다시 셰어를 위험한 위치에 놓이게 했다. 젤리코는 그의 함대를 남쪽으로 돌려 다시 셰어의 함대를 T자형으로 포위했다.[26] 세 번째 16포인트 회전이 이어졌고, 이는 히퍼의 피해를 입은 전함순양함의 돌격으로 엄호되었다.[27] 그런 다음 셰어는 함대에 야간 순항 편대를 채택하라고 명령했고, 이는 23시 40분에 완료되었다.[28] 셰어의 전함과 젤리코의 구축함 부대 사이에 일련의 격렬한 교전이 벌어졌지만, 독일 함대는 구축함을 돌파하여 혼스 리프로 향했다.[29] 고해상 함대는 6월 1일 13시에서 14시 45분 사이에 야데에 도착했고, 셰어는 손상되지 않은 제1전투함대의 전함들이 야데 로드스테드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카이저'급 전함은 빌헬름스하펜 바로 외곽에서 대기 상태를 유지하도록 명령했다.[30]

3. 4. 유틀란트 해전 이후

전투가 끝난 후, 셰어는 황제에게 전투 평가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그 보고서에서 그는 대서양에서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 재개를 강력히 촉구했다. 그는 그것이 영국을 패배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셰어는 그 해 남은 기간 동안 해군 사령부와 이 문제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31] 결국 셰어와 그의 동맹들이 승리했고, 무제한 잠수함 작전은 1917년 2월에 재개되었다.[32] U보트만이 영국을 패배시킬 수 있다는 확신에도 불구하고, 셰어는 계속해서 수상함대를 활용했다. 1916년 8월 18일부터 19일까지, 고해함대는 다시 출격하여 비티 제독의 전함 전대를 유인하고 격파하려고 시도했다. 영국 해군은 다시 독일 통신을 가로채고 대함대를 출격시켰다. 그러나 이 경우 셰어의 정찰은 의도한 대로 작동하여 대함대의 접근을 알리고 독일로 후퇴할 시간을 벌었다.[33] 1917년 후반, 셰어는 함대의 경함대를 사용하여 북해에서 노르웨이로 가는 영국 호송대를 습격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영국은 호송대를 호위하기 위해 전함을 배치해야 했고, 이는 셰어에게 대함대의 여러 전함을 고립시키고 파괴할 기회를 제공했다.[34] 1918년 4월 23일, 셰어는 호송대 중 하나를 요격하기 위해 고해함대 전체를 파견했다. 그러나 히퍼의 전함 전대는 어떠한 함선도 발견하지 못하고 여러 번 호송대의 경로를 가로질렀다. 나중에 독일 정보부가 호송대가 영국을 출발하는 날짜를 잘못 계산했음이 밝혀졌다. 독일 함대는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오후 7시까지 북해 기지에 도착했다.[35]

3. 5. 해군 참모총장 취임 및 종전

1918년 6월, 헤닝 폰 홀첸도르프 제독의 건강이 악화되어 해군 참모총장직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36] 7월 28일, 셰어는 홀첸도르프가 황제에게 사임서를 제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37] 1918년 8월 11일, 셰어는 해군참모총장으로 승진했고, 그의 부하였던 프란츠 폰 히퍼가 고해함대 사령관직을 승계했다.[38]

다음 날, 셰어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에리히 루덴도르프와 회담을 가졌다. 악화되는 전황에 대해 논의했고, 독일군이 방어적인 입장으로 몰리면서 세 사람은 U보트 작전만이 독일의 승리에 대한 유일한 희망이라는 데 동의했다.[39] 셰어는 U보트 대량 건조 계획을 추진했는데, 1918년 4분기에 매달 16척 이상, 1919년 3분기까지 매달 최소 30척 이상을 건조하여 총 376~450척의 새로운 U보트를 확보하는 것이었다.[40] 그러나 독일 해군 사학자 홀거 헤르비히는 이 계획이 "국내외에 영향을 미치도록 고안된 대대적인 선전 활동"이었다고 평가했다.[41]

1918년 10월, 전쟁에서 사실상 패배한 상황에서 셰어와 히퍼는 영국 대함대에 대한 최후의 대규모 공격을 계획했다. 셰어는 해군의 손실에 관계없이 영국 해군에 최대한의 피해를 입혀 독일에게 유리한 협상 위치를 확보하고자 했다.[42] 이 계획은 경순양함과 구축함에 의한 두 차례의 동시 공격(하나는 플랑드르에 대한 공격, 다른 하나는 템스 강 하구의 선박에 대한 공격)을 포함했다. 5척의 전함은 템스 강 공격을 지원하고, 드레드노트급 전함들은 플랑드르 해역에 남아 있을 예정이었다. 두 차례의 공격 후 함대는 네덜란드 해안에서 집결하여 대함대와 전투를 벌일 계획이었다.[43]

그러나 함대가 빌헬름스하펜에 집결하는 동안, 전쟁에 지친 수병들이 대규모 탈영을 시작했다. ''폰 데어 탄''과 ''데어플링거''에서 약 300명의 선원이 갑판을 넘어 해안으로 사라졌다.[44] 1918년 10월 29일, 반란이 발발했고, 튀링겐과 헬골란트 전함에서는 파괴 행위가 자행되었다. 결국 출항 명령은 취소되었고 계획된 작전은 포기되었다. 반란 진압을 위해 고해함대 전대는 해산되었다.[45][44]

4. 사후 영향

중순양함 '아드미랄 셰어'는 라인하르트 셰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그의 딸 마리안네가 명명식을 거행했다.[51] 이 함선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라이히스마리네에 의해 주문 및 자금 지원을 받아 1933년에 진수되었다.[51]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2번함 아드미랄 셰어와 서독 해군의 138형 교육 프리깃 셰어(구 영국 해군 개량 블랙스완급 슬루프 "하트")의 함명 또한 셰어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5. 평가

라인하르트 셰어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해군을 대표하는 유능한 지휘관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유틀란트 해전에서 보여준 전술적 능력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당시 독일 해군은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셰어는 영국 해군에 상당한 피해를 입히는 데 성공했다.[31]

하지만 셰어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강력하게 지지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는 대서양에서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 재개가 영국을 패배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31] 그의 주장에 따라 1917년 2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 재개되었지만, 이는 국제법 위반이며 수많은 민간인의 희생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중도진보적한국어 관점에서 셰어는 유능한 군인이었지만,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을 추진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그의 군사적 업적은 인정하지만, 그가 추구했던 목표와 그 결과는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6. 수상 내역

국가훈장
프로이센붉은 독수리 훈장 대십자장
프로이센푸르 르 메리트 (군사), 1916년 6월 5일, 떡갈잎 장식 (1918년 2월 1일)
독일철십자 훈장 (1914년), 1등급 및 2등급
프로이센호엔촐레른 왕가 훈장 기사십자장
프로이센근무 훈장
프로이센왕관 훈장 1등급 검 장식
바이에른막스 요제프 군사 훈장 대십자장
안할트알베르트 곰 훈장 대십자장
바이에른군 공훈 훈장 대십자장
작센성 헨리 군사 훈장 기사십자장 (1916년 6월 23일)
작센알베르트 훈장 대십자장
메클렌부르크그리폰 훈장 대십자장
올덴부르크페터 프리드리히 루이스 가문 및 공훈 훈장 명예 대십자장
뷔르템베르크군 공훈 훈장 기사단원
메클렌부르크-슈베린군 공훈 십자장 1등급
오스트리아프란츠 요제프 훈장 대십자 기사장 (1911년)[52]
오스트리아레오폴드 훈장 대십자 기사장 (1916년)[52]
일본욱일장 3등급
이탈리아모리스와 라자루스 성인 훈장 대장
오스트리아철관 훈장 3등급
러시아스타니슬라우스 훈장 2등급


7. 저서


  • 라인하르트 셰어 저, 『대전중의 독일 해군』(海軍司令部 摘訳) (수교사(水交社) 1922년)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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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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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서적
[43] 서적
[44] 서적
[45] 서적
[46] 서적
[47] 서적
[48] 서적
[49] 서적
[50] 웹사이트 Reinhard Scheer https://www.findagra[...] Findagrave.com 2003-09-23
[51] 서적
[52] 간행물 Hof- und Staatshandbuch der Österreichisch-Ungarischen Monarchie Druck und Verlag der K.K. Hof- und Staatsdruckerei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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